1) 스토리 하나
2013년 여름 K시(지방 소도시.내전이 가장 치열했던 곳)에 거주하는 우리 고려인 최 마리나의 남편이 살해되었다. 식당의 경리 일을 보던 그녀의 남편은 고려인이다. 남편이 살해 당하자 경찰이 왔지만 더 이상 조사하지 않는 것으로 최대한 빨리 수습했다.
보복을 두려워 하는 고려인들의 삶의 모습이다. 조사를 시작하면 8살된 아들을 누군가가 죽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억울한 죽음에 대해 침묵케 했다.
이와 같은 일이 몇 년 전에 T 국 수도 인근도시에서 벌어졌는데 당시 학생이었던 고려인 자녀 알료사(당시,15세)군을 본족 친구들이 보트 밖으로 밀쳐 물에 빠져 죽게한 사건이 발생했다. 사건의 진위를 가린 결과 명백한 타살로 증명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사건을 끌지 않고 조기 수사 종결로 마무리 지었다. 그 이유는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있는 가족의 머리를 짓눌렀기 때문이다.
무슬림 이웃들이 보복하리라는 공포심은 고려인들로 하여금 억울한 사건에 대해 침묵하며 견디다 가슴앓이로 이어져, 병을 앓거나 고통 속에서 살아가게 만들고 있다. 소수민족의 아픔이다. 이것은 특별히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인권이 보장 되지 않는 나라에 살면서 그들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삶의 대응 방식이다.
유랑민 고려인의 입에서 나온 가녀린 호소 중 뼛속 깊이 느껴지는 아픔으로 전해져 온 한마디는 “우리는 나라가 없소! 우리 백이 되어 줄 나라가 진정 없다는 말인가?”였다.
조국이라는 울타리가 없는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고려인들!
온 가족이 삶의 무게를 피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각국으로 흩어져 살고, 비행기 값 때문에 가족들이 서로 만나지 못하고 살아가는 고려인들! 그들의 비극적인 역사는 과연 돌이킬 수 없는 것일까?
2)스토리 둘
벽돌 공장에서 평생 일하다 은퇴하고 매월 3만원 정도의 연금을 받으며 생활하던 이원석 할아버지는 블라디 보스톡(원동)이 고향인 고려인들과 달리 북한에서 17세까지 살다 벌목 노동자로 연해주로 왔다가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이다.
경성(당시 서울)에 수학여행을 갔던 추억을 가진 할아버지, 평양에서 할머니를 따라 교회를 다녔던 할아버지의 농축되어 응고된 그리움은 고국에 대한 향수이다.
서른 살이었던 아들이 죽고, 열 여섯된 손주마저 죽자, 장애인 아내, 이혼한 딸과 지방의 소도시에 살았던 할아버지는 그 누가 봐도 허리가 구부러진 노동자 출신 고려인이다.
그러나 조국에 대한 그리움이 너무도 짙어 조국 코리아를 말할때면 소년보다 더 불그스레한 얼굴로 변해 피어린 고통과 그리움에 안타까움이 뼛속까지 스며들게 하고 있다.
그렇게 평생을 낯선 나라, 무슬림 땅에 살고 있는 고려인들! 이제 다 떠나고 세 가정 정도 밖에 남지 않는 소도시에서 할아버지의 외침이된 조국에 대한 그리움을 누가 채워줄 것인지! 가슴이 무너지고 있다.
이혼한 딸이 교사를 하며 생계를 유지했지만 한달 월급이 고작 미화 50달러이기에 할아버지가 살아낼 수 있는 삶의 상황은 아니었다.
결국, 큰 딸이 러시아에서 보내주는 돈으로 난방이 안되는집을 위해 석탄 가루를 사고, 나무를 사서, 겨울을 준비 하던 고려인 할아버지의 삶은 고국으로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또 겨울엔 늘 전기가 없어서 차가운 방에서 찬밥을 물에 말아 먹었던 풍경들이 보는이의 가슴에 남은 낡은 그림이지만, 잊을 수 없는 중앙아시아에 버려진 고려인의 삶이 힘없는 국가의 백성으로 살아가야하는 아픔이 되고 있었다.
고려인 할아버지는 끝내 큰 딸이 있는 시베리아로 장애인 아내를 데리고 이주했다. 사위 눈치를 보며 말년을 살고 있을 유랑민 고려인 할아버지는 지금도 생존해 계실 것인지....
아니면 추운 시베리아에서 조국을 떠나온 아픔과 거의 반평생을 살았던 제2의 고향인 중앙아시아 T 국을 또다른 망향의 노래로 이아가고 있는지 가슴이 애려오고 있다.
과연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들의 아픈 삶의 역사를 품어 안아줄 수 있는 힘이 없단 말인가!
3) 스토리 셋
지방에 살고 있던 박 마야는 얼마 전에 남편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간암으로 수도 두샨베의 병원에 입원했지만 수술 후 며칠이 지나지 않아 목숨을 거두었다.
환자의 죽음도 확인하지 못한 채 검고 때묻은 군용 담요로 싼 시체를 병원은 건네주었다. 우리는 급하게 차를 불렀고 시체를 싣고 덜컹거리는 길을 몇 시간 달려와서 장례를 치루었다.
남편의 장례식에 참여한 고려인 남자는 모두 세 명,
한 명은 알루미늄 공장에서 평생 기술자로 일하다 지병을 앓는 친정오빠, 간질을 앓고 있는 서른이 넘은 조카, 그리고 친구의 남편, 그 세 명이 장례식에 참석한 고려인 유가족 전부였다.
게다가, 그 지역의 거주 고려인은 다섯 가정 정도가 남아 있으나 남편이 있는 사람은 한 명 그 외에는 모두 과부이다.
그들 대부분은 김치 장사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겨울철엔 전기가 없어 난방이 안되는 곳에서 산다. 불과 몇 년전만 하더라도 수도인 두샨베조차 겨울에 전기가 없는 경우가 허다했으므로 지방은 말을 해서 무엇하랴!
장례식장에 참석한 가족 중 여동생이 뒤늦게 장례식에 참석했다. 그녀는 내전 때 남편을 잃고 과부로 살고 있다. 그녀의 딸은 타직남자를 사랑했으나 아이도 낳기 전에 버림을 받았다. 그후 혼자 아이를 낳아 기르고 있다. T국에 버려진 고려인 대부분 삶이 이런지라 장례식은 초라하게 치러졌다. 카작스탄에 있는 작은 딸이 후에 왔지만 블라디보스톡에 사는 큰 딸은 장례식도 참석 못하고 전화로 오열을 터트렸다.
이것은 중앙아시아 T국에 사는 고려인들의 일상적인 삶의 풍경이다.
하얀 천으로 주검을 가리고 쌀로 염을 한다, 그리고 평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붉은 천에 한글로 이름을 쓴다. “신 일리아” 그 이름을 써서 걸으며 딸과 아내가 오열한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찬송을 부르며 그 뒷날 바로 묘지에 묻는다. 그 한켠에 여자들만 머리에 흰 두건을 두른 채 울고 있는 그 풍경은 세계 10대 경제대국이라고 자랑하는 조국 대한민국이 버린 유랑민 고려인의 외롭고 참담한 장례식 풍경이다.
중앙아시아 최빈국에 버려진 유랑민 고려인 아낙들은 어떻게 한의 무게를 지고 삶을 이어갈것인지!
"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날 때까지" 의 찬송가처럼, 그들은 이국땅의 쓸쓸한 나그네로 살며, 버려진 동족은 애써 외면하고 경제대국이라고 외치며 호화스럽게 살아가는 조국 대한민국을 끝없이 기다리며 한민족의 한(恨)을 이어갈 것이다.
된장을 먹지만 한국말도 제대로 못하며 조국 잃은 백성으로!
나눔방송: 광주고려인마을 (http://www.koreancoop.co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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